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그 특사 (문단 편집) == 배경 == [include(틀:경술국치)] 대한제국은 [[만국평화회의]], 적십자회의 등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하였다. 1900년 5월 외부대신 [[박제순]]으로 하여금 벨기에 전권대신에게 헤이그 평화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협조를 의뢰하였다. 이후 고종은 민영찬을 만국 평화 회의의 총재에게 보내 적십자회 가입과 만국 평화 회의의 사절단 파견 등을 타진하고 1903년 1월 가입 허가를 받았다. 1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것은 1899년이다. 1903년 고종은 2차 만국평화회의와 1864년에 창설된 국제 적십자 위원에 가입하고 싶다는 서한을 네덜란드로 보냈다. 이듬해인 1904년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으므로 당연히 이범진의 지위도 무력해진 상황이었지만 이범진은 본국의 호출도 씹고 [[경술국치]]까지 버티며 공사관 업무를 지속했다. 경술국치 후엔 결국 [[자살|자결]]하지만...]은 러시아 외무 대신 람스도르프의 언질로 한국이 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명단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회담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을 한창 견제하다 못해 같은 해 [[러일전쟁]]까지 치르게 됐으므로 한국이 초청국 명단에 들어간 것은 다분히 일본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은 1905년 9월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가 함께 헤이그특사 파견을 계획하였다. 한국이 정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이범진이 1905년 10월 이미 람스도르프에게 정식 초청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은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계획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